다지원 세미나강좌 PRAB & NEHU ∥2010년 4월 20일∥발제자: 쿠다

텍스트: 맑스,『루이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18일』,박종철출판사, 282~337쪽

 

1. 요약

1.1. “본 서는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이 남아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며, 그 사료는 2월(1852년)을 넘지 않고 있다.”(282) 맑스의 <브뤼메르 18일>과 함께 동시대사를 다룬 작품으로는 빅또르 위고의 <소 나뽈레옹>과 프루동의 <쿠데타>를 언급하고 있다. 빅또르 위고는 한 개인의 행위를 중심으로 서술한 나머지, 나뽈레옹이란 인물을 의도와는 다르게 두각시켰으며, 프루동은 나뽈레옹의 쿠데타를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 서술하려 했으나, 역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에게 면죄부를 씌워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 두 서술을 비판하면서 맑스의 서술전략은 “우스꽝스러운 한 인물이 주인공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정세와 상황이 프랑스 에서의 계급투쟁에 의해 어떻게 창출되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1.2. 동시에 이른바 “케사르주의”라는 피상적인 역사적 유추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의 방식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고대 로마에서 역시도 계급투쟁은 존재했으나,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한에서의 계급투쟁과는 다른 것임을, 즉 그들이 각자 처한 물질적 경제적 조건들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계급투쟁의 분석들을 수행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 역사를 통해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이 케사르주의적 방식이 아니었을까?) 역사분석을 통해 계급투쟁의 지형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이어야함을 의미한다.(이상 2판 서문)

1.3.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는 헤겔의 말에 맑스가 덧붙인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당똥 대신에 꼬시디에르,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불랑, 1973-95년 산악파 대신에 1848-51년의 산악파, 삼촌 대신에 조카. 여기에다 브뤼메르 18일의 재판까지.

1.4. 1848년 2월 혁명과 5월 15일, 6월 봉기의 패배를 거쳐 1851년 12월 2일 보나빠르트의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의 1848년 혁명과 반혁명의 과정은 부르주아 혁명이 새로운, 미래의 혁명이 아니라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 속의 악마처럼, 살아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르며” 과거의 유물속에서 자신의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했다. 때문에 황색 장갑을 낀 공화주의자 마라스트에서부터, 나뽈레옹의 철제 데드 마스크속에 자신의 구역질 나는 면상을 숨긴 모험가에 이르기까지 낡은 혁명의 유령만이 배회한 이유이기도 하다.

1.5. 이와는 달리 사회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과거가 아니라 오직 미래로부터만 이룰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은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을 떨쳐 버려야만 스스로 시작할 수 있음에 반해 이전의 혁명들은 자기 자신의 내용에 관해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세계사를 회상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혁명에서는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였다. 19세기의 혁명에서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

1.6. 2월 혁명은 낡은 사회에 대한 습격이었으나, 사회가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는 대신에 국가의 노골적인 지배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프랑스는 압축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경험했으며, 프랑스 사회가 출발점 뒤로 물러서 있는 듯하지만, 이제야말로 “현대의 혁명이 진지한 것으로 되는 상황, 관계들, 조건들을 이제 비로소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 혁명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목적들이 너무나 거대하다는 것에 놀라 거듭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떠한 반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창출되어 관계들 자체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면 이러한 물러섬은 끝나게 된다. :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 춰라!

1.7. 2월 혁명과 반혁명에 대해, 루이 보나빠르트의 쿠데타에 대해 프랑스 인들이 말하듯이 자기네 국민이 급습당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떻게 3명의 고등 사기꾼들이 3천 6백만 명에 달하는 국민을 급습하여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서 그들을 포로로 할 수 있는가는 아직 풀리지 않고 남아 있다.”

1.8. 프랑스 혁명이 경과한 국면들을 살펴보자. 1기(1848년 2월 24일 루이-필립의 전복으로부터 5월 4일의 헌법제정 국민의회 소집까지의 시기), “아무도, 아무것도 감히 계속 존재할 권리, 실제로 행동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지 못한” 채 임시적으로 각 당파가 2월 전부내 자리를 차지하였다. 2월 혁명을 구성했던 각 당파들은 공화제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잡다한 혼합물”이 섞이지도 않은채 ‘주어진 정세와 관계들 아래에서 당장 직접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과 모순된 상태로 ‘임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1.9. 2기(1849년 부르주아 공화제의 제정, 그 수립의 시기)에 빠리 프롤레타리아트는 5월 15일과 6월 폭동으로 부르주아의 지배형태의 변경, 즉 군주제적 형태 대신에 공화주의적 형태로의 변경뿐인 이 사태에 대해 항의했으나 패배했다. 6월 폭동의 패배로 인해 부르주아 공화제가 수립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으나, 이 패배는 동시에 유럽에서 문제되는 것이 ‘공화제냐 군주제냐’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즉, 유럽에서는 부르주아 공화제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무제한적 전제(專制)를 의미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1.10. 6월의 날들이래 순수 공화파의 배타적 지배가 이뤄지는데, 이것은 그들이 몽상하는 것처럼 왕권에 맞서 부르주아지가 자유주의적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동이 진압됨으로 인해, 즉 반혁명을 통해 그들의 ‘혁명’이 완수되었을 뿐이다. 이 순수공화파의 지배는 공화제 헌법의 작성과 그들의 발명품인 빠리의 계엄으로 요약된다. 그들이 작성한 헌법은 7월 왕정의 기본법에 기반해 있으며, 인신의 자유, 출판, 언론, 결사, 집회, 교육, 종교의 자유 등등 요컨대 헌법은 일반적 문구에서는 자유를, 단서 조항에서는 자유의 폐기를 담고 있다. 즉 자유라는 명목은 존중되었고 그것의 실제적 행사만이 방해받았을 뿐인 이 헌법조차도 아킬레스건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갈라져 있는 두 개의 머리”- 입법 의회와 대통령이다. 이 헌법은 권력 분립을 신성화할 뿐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모순에까지 이 분립을 확대했다. “이 헌법은 1851년 12월 2일 사람의 머리에 의해 전복된 것이 아니라 다만 모자와 접촉함으로써 전복되었다.” 또 하나 계엄상태. 프랑스를 조용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 주기적으로 그 사회의 머리 위에 내려 앉았던 병영과 야영. 헌법은 이미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문에 총검에 의해 보호받아야만 하는 존재였으며 그 총검의 도움을 받아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사실이 빠리의 빈번한 계엄상태들을 통해 드러난다.

1.11. 1848년 12월 20일부터 1849년 5월의 헌법제정의회 해산까지의 시기는 부르주아 공화파의 몰락의 역사를 포괄한다. 순수 공화파는 질서파로 통합된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에게 자리를 내주고(헌법 제정의회의 해산), 질서파의 독재를 거쳐 질서파와 보나빠르트의 권력 투쟁과, 뒤이어 보나빠르트의 쿠데타가 발생한다. 12월 2일 쿠데타 전까지의 시기가 입헌 공화제의 시기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맑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다. 제1차 프랑스 혁명에서는 입헌파의 지배 다음에 지롱드파의 지배가 뒤따르고, 지롱드파의 지배 다음에 자꼬뱅파의 지배가 뒤따른다. 이 당파들은 한층 진보적인 당파에 몸을 기댄다. 혁명은 이처럼 상승 곡선을 그리며 운동한다. 1848혁명은 그 반대이다. 프롤레타리아 당파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당파의 부속물이 되어 나타나고, 5월 15일, 6월 폭동에서 프롤레타라아 당파는 배신당한다. 민주주의당파는 부르주아 공화파의 어깨에 몸을 기대지만 부르주아 공화파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자마자 질서파의 어깨에 기대었다. 질서당은 부르주아 공화파를 자빠뜨리고 군대의 지지에 기댔다. 혁명은 이처럼 하강곡선을 그리며 운동한다. 왜 그런가?

1.12. 마치 공화제를 둘러싼 잡다한 혼합물로 범벅이 된 상황과 당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계급투쟁이 놓여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통 왕조파와 오를레앙 파는 군주제의 부활을 꿈꾸는, 공화파에 대립하는 왕조파로서가 아니라 다른 계급들에 대립하는 부르주아 계급으로서, ‘질서파’로 존재했다. 이러한 부르주아지 연합에 맞서 소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연합, 사회 민주주의당(산악파)이 한편으로 존재했다. 단지 수적으로 강화되었을 뿐인 이 당은 임노동의 폐지가 아니라 자본과 임노동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해 사회개조) 심지어 산악파의 심각한 무능력은 질서파의 독재로 이어졌으며, 보나빠르트로 하여금 풀드로 대표되는 금융자본이 다시 활개칠 수 있도록 하는 지반을 열어주었다. 이 와중에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이 봉건주의를 겨냥해 만들었던 무기들이 모두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사회주의적으로’ 되어버렸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의 계급 지배의 사회적 기초속에서 사회주의의 의미와 경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의회의 모든 것을 다수의 결정에 맡긴다. 그런데 어떻게 의회 저편의 거대한 다수가 결정하려 하지 않겠는가? 당신들은 국가의 꼭대기에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아래 쪽에 있는 사람들은 춤추지 않기를 바라는가?” 따라서 부르주아지는 이전에 자신들이 자유주의적으로 찬양했던 것을 이제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방함으로써, “자기통치”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1850년 5월 31일 새 선거법에 의해 보통 선거권은 폐지된다. 이것은 부르주아지들의 쿠데타였다.

1.13. 이 선거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모두 막혔다. 그들은 완전 고용상태에 있으면서, 민주주의자들의 지도에 자신을 내맡기고, 순산의 안락에 눈이 멀어 자기 계급의 혁명적 이익을 망각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은 1848년 6월의 패배로 인해 그들이 지난 몇 년 동안 투쟁의 불능에 빠져 버렸다는 사실, 역사과정이 당분간 다시 그들의 머리 위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것이 1848혁명이 하강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2. 질문하거나 토론해 보고 싶은 문제

2.1. 당시 프랑스는 산업자본보다 금융자본이 더 발달했었나? 금융자본의 원천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2.2. '관계들 자체‘의 외침(291)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3. 1848 혁명기간동안 ‘3명의 고등 사기꾼’은 누구?(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