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의 일종의 "야누스적인 구조"와 더불어 두 가지 얼굴이 있다.

한편으로, 실제로 자본주의가 1968년에 열려진 투쟁의 세기 이래로 노동력의 주체성을 포섭하고 통제하여 이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물질 그 자체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부분적으로는 공장 밖에서 재조직되고 예속과 착취의 배치(다시 말해, 가치생산의 방식)를 변경시킨 그 방법을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가치화에 필요불가결하게 된 이 주체성 자체가 또 다시 이전보다 더 통제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 방식(생산 속에 포섭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자본에게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에) 더욱 더 강하게 통제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 방식을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생산과정의 중심에 그리고 자본주의적 가치화의 핵심에 주체성의 생산과 사회화의 메커니즘을 삽입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예속과 착취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본의 심장에 트로이의 목마를 집어넣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성이 투쟁의 동력이라면 인지적 생산은 주체성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탄생과 첫 번째 산업화에 어울리기 위해, 그리고 이윤극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권력관계가 신체정치학적이게 되는, 말하자면 삶 전체로 확장되는 방식에 대한 미셸 푸코의 분석을 알고 있다.


노동자의 삶을 지배(통제)한다는 것은 19 세기 초부터 역사적으로 생활양식을 통제하고 그것(생활양식)을 생산과의 관계에서 완전하게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반해 네그리는 그의 글에서 오늘날의 가치화 과정을 특징짓기 위해 "삶정치"이라는 용어를 재사용하여 삶 전체를 노동에 투입하는 것을 서술한다 : 삶은 더 이상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산물 그 자체다: 삶은 포획(들뢰즈)되고 착취되고 예속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이는 삶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이라는 것은 마치 삶정치학이 단순하게 신체의 생물학이나 신체의 생리학이 아니다 - 기술적인 착취가 아닌 것처럼


조에로 환원되어진 비오스의 대사제들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소위 그들의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제한된 삶에 대한 지지 사회정치적 삶을 동물적인 삶으로 축소시키는, 이른바 그것의 자연태에 제한된 그 삶의 지지자들에도 불구하고, 삶정치학의 비판은 그것보다 더 많은 것에 연루된다.


왜냐하면 삶이 무엇보다도 관계들, 정서들, 협력들의 총체이고 그 지식과 언어의 유통의 총체이고 행위와 지식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직업에 기초해서 서로 공유되고, 그리고 부단히 우리가 속해 있는 일 위해서 다시 놓여지면서 생겨나는 사회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