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에 길을 묻다'를 읽고(발표 : 돌민)
dolmin98@hanmail.net

부족한 글입니다, 발췌문에 촌평을 덧붙인 글입니다. 백영서·최원식의 토론을 되도록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 예로 든 “동아시아론”에 대해서도 설명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전체를 편의상 세 부분 1. 인문학, 2. 대학, 3. 기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1. 인문학

1.1 현시기 인문학 현상의 의의와 함정

최원식은 “현시기 인문학 현상의 의의와 함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행동을 봉쇄하는 인문정신론을 경계하면서 제대로 된 인문학을 건설하는 게 핵심이지요.”
최원식은 인문정신론이 왕년의 ‘행동’을 비판하는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되 이 국면을 과거 행동론의 미달점까지 개조하는 장으로 잘 활용해서 새로운 인문학, 또는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는 인문학으로 가져가자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인문정신론이 “행동”에 묶인 것 같습니다.

1.2 인문학의 엘리뜨주의를 넘어

최원식은 “인문주의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기존의 인문주의가 지니고 있던 한계를 돌파한다고 하면서 혹 귀족주의 또는 엘리뜨주의로 흘러갈 위험에 대해 제가 그래서 처음에 그런 얘기를 한 거예요.”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회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에 대한 엘리뜨적인 비탄과도 같아요.”

처음에 한 그런 애기 - 행동을 봉쇄하는 인문정신론 - 의 성격이 나오는 셈입니다. 엘리뜨성입니다. 또한, 행동을 봉쇄하는 인문정신론의 구체적인 대상도 나옵니다.

“글쎄, 인문학이 고독한 것이라고 옛 선비들을 들먹이며 비정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우스워요. 왜냐하면 그게 전통적인 학인의 태도는 아니거든요.”라고 말입니다.

1.3 창비가 걸어온 길, 걸어갈 길

백영서는 “창비가 걸어온 길, 걸어갈 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소통의 문제 얘기를 하다 보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군요. 작년의 촛불집회 이래 주목받는 것으로 무수한 개인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생산의 주체로 떠오른 현상이 있지요. 그들이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문제제기를 함과 동시에 자신이 해결자로 나서는데, ‘대중지성’이라고도 불리잖아요. 창비담론이 그들과 어떻게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가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 변해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또 대중지성이니 뭐니 하고 이름붙이지 않더라도 대학 수업에서 만나는 보통 학생들, 취업준비에 시달리는 젊은 친구들의 일상적인 삶의 고민, 그야말로 인문학적인 문제제기와 어떤 통로로 만나야 하는가도 무시할 수 없지요.”

우리도 이 부분“의/에” 길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대학

2.1 한국 대학과 학문의 식민성

최원식은 “신자유주의 개혁”과 “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요즘에는 다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데, 신자유주의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는 반대예요. 물론 대학사회를 돈벌이 열풍에 몰아넣는 최근의 이상한 대학개혁에 저도 단연 반대하는 입장입니다만, 우선 왜 이런 사태가 왔는지 먼저 우리 교수들이 반성할 필요가 있어요. 분과체제를 방패로 학생들이 죽든지 살든지, 어떤 개혁에도 등 돌리며 세상과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교수들의 나태가 신자유주의 ‘개혁’을 자초한 셈이거든요.”

일리가 있습니다.

2.2 대학 밖의 인문학과 대학 안의 인문학

백영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렇게 제도 바깥의 힘이 대학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기계 속에 흡수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70년대에 새로운 인문학을 추구하는 사조와 운동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날 그것이 가능한가를 점검하기에 앞서 그때 바람직한 변화를 왜 더 많이 생성하지 못했을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자문했던 물음에 답하면서 말입니다.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식의 분과체제를 방패로 학생들이 죽든지 살든지, 어떤 개혁에도 등 돌리며 세상과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교수들의 나태가 신자유주의 ‘개혁’을 자초한 셈이라는 말과 말입니다.

2.3 국가 주도 학술프로젝트의 한계와 가능성

최원식은 “국가 주도 학술프로젝트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니 이게 참, 호랑이 등을 안 탈 수 없는 지경이었지요.”

이 말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3. 기타

3.1 평가제도의 개선, 누가 나서야 하는가

이 부분은 평가제도의 개선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3.2 동아시아론 비판에 대한 반비판과 자기비판

이 부분은 새 인문학의 예로서 “동아시아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론에 대해 “분단체제론” 등을 토론합니다.

최원식은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2009)에 실린 ‘천하삼분지계로서의 동아시아론’에서 “민족문학론”과 “제3세계주의”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미(歐美) 또는 동구라는 기원에 대한 안타까운 동경을 거절한 민족문학론은 그 댓가로 민족주의로 경사할 위험에 더 노출되기 마련인데, 이 점에서 제3세계론은 민족문학론 안에 내장된 민족주의라는 인화물질을 적절히 제어할 일종의 지렛대였다.
그럼에도 약간의 우려가 없지 않았다. 서구(또는 동구)문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아랍·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문학을 새로운 전범으로 설정하는 일종의 제3세계주의적 경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동아시아론”에 관해서는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북한을 의식적/무의적으로 배제한 채, 남한의 문맥에서 접근하는 반국주의적(半國主義的) 시각을 넘어 북한을 시야에 넣은 한반도 차원의 일국주의로 나아간 것이 민족문학론이라면, 다시 일국주의를 넘어 한반도가 자리한 지역(region)을 숙고하자는 것이 동아시아론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운동론보다는 문명론적 감각이 승했다.”라고 말입니다.

한편, “분단체제론”에 관해서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북을 기지로 삼는 NL적 경향(주사파)과 북을 괄호치는 PD적 경향 양자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최원식은 “최근 분단체제 극복을 중심축에 둔 동아시아론을 다시 풀어보고 있다.”라고 합니다.

결국, 최원식은 같은 글에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와의 연대를 기본으로 하면서 제3세계주의로 미끄러지지 않는 현실적 대안으로서, 세계로부터 한국으로 내려먹이는 제국주의적 시각과 한국으로부터 세계로 나아가는 아제국주의적 시각을 넘어서는 제3의 선택이 바로 동아시아론”이라고 주장합니다.

3.3 새로운 인문학으로서의 사회인문학

이 부분은 새로운 인문학으로서 “사회인문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