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자 다지원 소식
□ 다지원 미학 시학 세미나 ∥2010년 9월 3일∥발제자: 이신혜
텍스트: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5, 새물결, 2008, p.225~237
1. 요약 _ R 〔거울〕
1.1. 거울을 이용해 거리라는 외부 공간을 카페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 또한 복수의 공간이 겹쳐지게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로 -산책자는 이러한 광경에 꼼짝없이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중략)극히 평범한 선술집이라도 눈의 착각을 노리고 있다. 어떤 술집에서든 좌우로 진열된 상품이 거울을 부착시킨 벽에 반사 되면서 인공적인 넓이를 얻게 되고 램프불빛 아래에서 그것의 넓이는 몽환적일 정도로 까지 확대된다. 칼 구츠코,『파리에서 온 편지』라이프치히, 1842년, 1권 225페이지 [R1,1]
1.2. 이 거울들은 어디에서 만들어 졌을까? 그리고 음식점에 거울을 다는 풍숩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3. 오래된 그림을 위해 만들어진 고가의 액자에 그림이 아니라 거울을 끼워 넣는 풍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1.4. 두 개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게 하는 것이야 말로 악마가 가장 애용하는 속임수로, 정말 그다운 방식으로(그의 파트너인 신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선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거울 속에 무한에의 원근법을 펼친다. 그것이 신적인 것이든 악마적인 것이든 파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이미지 같은 원근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 개선문, 사크레 쾨르, 심지어 팡테옹조차 멀리서 보면 낮게 떠 있는 상처럼 보이며, 건축을 통해 신기루를 만들어내고 있다. ▖원근법 [R1,6]
1.5. 이러한 거울의 마술의 최후의,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작품을 지금도 볼 수있는 것은 오늘날에는 이미 쇠퇴하고 있는 거울의 매력이나 수익성 덕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막대한 제조비용 덕분일 것이다. 그레벵 밀랍 인형관의 ‘환영들의 방’이 바로 그러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철제 지주와 무수한 각도로 교차하고 있는 거대한 거울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최후의 장소였다. 철제 지주를 어떤때는 그리스풍 기둥으로, 또 어떤때는 이집트풍 간주들로, 혹은 가로등 기둥으로 다양하게 꾸며놓기 때문에 관람객은 이루 다 살펴보기 힘들 정도로 넓고 넓은 고대 사원의 기둥 숲과 말하자면 여기에 한 벌을 이루어 역이나 시장 또는 아케이드가 무수히 줄지어 연결되어 있는 광경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전시중에는 수시로 조명이 바뀌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장면이 바뀔때마다 고전적인 요령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것은 카이저 파노라마관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세계여행을 했을 때 경험했던 충격과도 같은 것 이다.즉 이별의 슬픔으로 가득한 우리 눈앞에서 하나의영상이 천천히 입체경에서 사라져간 다음 또 다른 영상이 비쳐 질 때의 충격 말이다. [R1,8]
1.6. 자아중심적이다.-“파리에 있으면 인간은 그렇게 된다. 파리에서는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고는 거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득시글거리는 거울들! 카페에, 레스토랑에, 크고 작은 상점에, 미용실에, 문학살롱에, 목욕탕에, 그 외 모든곳에 거울이 있다. ‘1인치마다 거울이 하나씩!’인 것이다.” S. F.라르스,『파리에서 온 편지』유럽-교양세게의 연대기, [R1a,4]
1.7. 1851년 수정궁에 대해. “물론 이들 유리 표면들 그 자체는 빛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게 되어 있다./그러나 이때 모든 실내 설계의 주요한 수단, 즉 콘트라스트라는 수단이 희생되었다./ 그에 뒤이은 시대의 발전은 모두 이러한 수단에 의해 규정되게 되지만 결정적의미를 가진 관점에서 보면 1천년 후에야 비로소 금속의 빛남이 아닌 유리의 빛남과 함께 시작된다./...그리고 그것은 고딕 성당의창문과 함께 정점에 달한다....무색 유리의 투명도가 증가함에 따라 외부세계가 내부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벽을 거울로 장식함에 따라 내부 공간의 모습이 외부에 투사되게 된다. 내부든 외부든 ‘벽’은 공간을 나누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빛남‘은 그것의 본질에 속하는 고유의 색깔을 점점 잃어버리고 /점점 더 그저 외부의 빛을 반사하는거울이 되어간다./이것은 17세기의 세속적인 내부 공간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이때에 이미 물처럼 투명한 판유리가 벽에 뚫린 창문틀 전체에 끼워질 뿐만 아니라 방을 둘러싸고 있는 벽의 나머지 공간들도, 특히 창의 개구부와 마주보고 있는 부분에도 끼워진다. 그리하여 ’로코코양식의 실내의 거울 복도‘가 생겨나게 된다./...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콘트라스트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샹-샤펠에서든 │베르샤유 궁전의│거울들의 방에서든 표면과 빛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더 이상 빛이 표면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이 빛을 차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공간 가치의 발전에는 하나의 연속적인 계열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온실과 런던의 수정궁 홀이 이러한 계열의 종착점에 위치하는 셈이다.” A.G.마이어,『철골 건축물들』,에스링겐, 1907년, [R2a,1]
1.8. 우리가 알고 있는 봉건시대의 거울로 된 벽의 순수한 마력을 매혹적인 상점가를 걸을때 우리를 유혹하는 아케이드의 거울의 벽의 요염한 마력과 비교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유행품점 ▖ [R2a,2]
1.9. 아케이드의 양의성에 대한 고찰. 즉 아케이드가 거울로 넘쳐나며, 그로인해 공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어 그만큼 방향을 찾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거울의 세계 또한 다의적, 아니 무한대로 다의적일 수 있겠지만-그러나 역시 양의적으로 남아 있다. 이 세계는 눈짓한다.-이 세계는 언제나 하나의 세계이지 거기서 바로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게 해주는 무의 세계는 결코 아니다. 변신하는 이 공간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의 품안에서뿐이다. 이 공간에 놓인 칙칙하고, 지저분해진 거울 속에서 사물들은 무와 마치 카스파르-하우저와 같은 시선을 교환한다. 열반에서 보내는 양의적 눈짓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차가운 숨결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오딜롱 르동이라는 멋쟁이의 이름이다. 르동만큼 무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물의 이러한 시선을 제대로 포착하고 사물이라는 것과 무라는 것의 결탁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기술을 익히고 있는 인물도 없다. 이러한 시선들의 속삭임이 아케이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아케이드에서는 어떤 사물이든 전혀 얘상치 목한 순간 눈을 떳다가 눈짓하고는 감아버리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려고 하면 이내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아케이드라는│공간은 이들 시선의 속삭임에 메아리를 보낸다. 이 공간은 눈을 깜박거리며 “도데체 내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라고 묻는다. 우리는 질겁하며 자리에 멈춰 선다. “맞아, 도데체 네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 공간에게 작은 소리로 반문한다. ▖산책 ▖ [R2a,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