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읽고 교양 강좌(함께 연구 강좌)와 관련하여 갖게 된 생각을 짧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교육학의 신화는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지성의 불평등이다. 그러나 지성의 불평등은 허구적이다. 아니 지성의 불평등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결과일 수는 있지만, 지성의 불평등이 결과라는 것은 역으로 지성 자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중요한 것은 지성의 평등에 기초한 자기 계발을 통해서 지적 해방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우선 교양 강좌(함께 연구 강좌)의 교육자에게는 피교육자를 지도와 설명의 대상으로 사유하지 않을 것이 요구된다. 나아가 우리는 교양 강좌를 우리 자신(아니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지적 해방을 수행하는 장으로 사유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확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교육자/피교육자의 구분 자체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교육자/피교육자 사이의 지성의 불평등 이외에, 보다 근원적인 교육학의 신화는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구분된다는 사실, 즉 교육자/피교육자의 정체성을 신뢰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역으로 교양 강좌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과제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이분법의 극복은 교육자의 설명에 의해 피교육자가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피교육자가 장차 교육자가 될 수 있다는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 무지한 교육자가 마찬가지로 무지한 피교육자를 그의 의지에 기초하여 스스로 해방하도록 하는 것과도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교육자/피교육자의 정체성으로부터 교육자 다중과 피교육자 다중의 특이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자/피교육자 다중들의 공통되기를 과제로 삼는 것, 그래서 지성의 평등을 둘러싼 논의를 특이성의 공통되기라는 지평위에 재위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교양 강좌에서 이루어지는 지적 해방을 (교육자/피교육자의 구분을 전제한 다음 논의되는) 피교육자의 지적 해방과는 다른 지평, 즉 다중들의 삶정치적 실천의 지평안에 위치시켜야 한다. 결국 교양 강좌는 그 자체 다중들의 삶정치적 실천의 일환이어야 한다.

핵심적인 사항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이분법 자체를 넘어서는 것, 아는 교육자와 모르는 피교육자의 이분법(나아가 모르는 교육자와 모르는 피교육자의 이분법)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교양 강좌의 과제로서 사유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귀결은 교양 강좌를 문제가 아닌 물음을 중심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교육자가 이미 알고 있는 현대 사회의 제문제에 관한 지식을 피교육자에게 설명하는 장이 아니라, 교육자의 삶정치적인 지적 해방의 실천을 위해 물음을 던지며 피교육자와 함께 답을 모색해가는 장으로, 그래서 교육자/피교육자 모두가 함께 구성하는 물음과 답(현실적으로는 모르더라도 동시에 잠재적으로는 알고 있는)의 장으로, 교양 강좌를 사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자는 ‘무지한 스승’이 아니라 ‘무지하기도 하고 동시에 무지하지 않기도 한 스승’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