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또노미아, 제 10장 자율운동의 국제적 발전과 한국에서의 네그리, 1990년대 한국에서의 계급상황과 네그리 수용의 맥락, 발제 성용

1. 네그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1년 9월 출간된 『전복의 정치학』을 통해서였는데, 그것은 세계일보사의 21세기 신서 1권으로 출간되었다. 세계일보사의 의도는 새로운 좌파사상을 통해 전통적 사회주의 좌파의 죽음을 공고하게 하려는 사상적 이이제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1992년 3월 네그리를 두 번째로 소개한 『마르크스주의의 국가이론은 존재하는가』를 통해서였는데 이 책의 두 편자들은 ‘네그리의 논문은 민주주의 논쟁에 대한 무정부주의자의 입장을 보여주는 흥미롭지만 공허한 글이다’라는 서문을 붙이고 있다.

3. 그러나 1994년 이후 네그리 소개는 이와는 다른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1994년 6월 『성균비평』 창간호는 네그리의 1993년 작품 「대중의 지성으로 소비예뜨를!」을 소개 했으며, 8월 윤수종의 번역으로 네그리의 핵심저작 중의 하나인 『맑스를 넘어선 맑스』가 출간된다. 이 책의 역자 후기는 네그리의 사상이 1990년대 초의 ‘맑스주의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 검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맑스주의에 일시나마 빠졌던 것을 후회하고 이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돌아서는 것이 유행이 아닌가..현실사회주의는 무너졌고 공산주의는 끝났으니까! 안토니오 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짚어보고 넘어설 것을, 전향이 아니라 전화를 요구한다.

4.1. 전화의 방법론은 ‘전향인가 고수인가’라는 경직된 대립이 낳는 소모성에 대한 새로운 대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4.2. 1995년 5월 출간된 『자유의 새로운 공간』 을 통해 이원영은 볼셰비즘에서 적대의 관점과 봉기의 관점을 수용하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다양성과 이질성, 그리고 자유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더 이상 전위당 개념에 기초하지 않고서 적대 전선의 다층화, 다양화, 다각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혁명적 정치학의 구성을 제안한다.

4.3. 전위적 중앙 주의가 다각적으로 재구성된 주체들의 힘을, 제각각 투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야 할 제 주체들의 자기표현의 욕구를 앗아가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이원영은 1995년 11월 민주노총의 결성과 때맞추어 『디오니소스의 노동』번역에 착수한다. 1995년 이후 개혁주의로 기울어가는 한국 사회운동의 제도화 경향에 대한 비판적 해독제로, 일종의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

6. 『디오니소스의 노동』 속에서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은 케인즈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탈리아 전후 노동헌법에 대한 비판, 공공 지출에 대한 분석 등을 통해 나타난다. 이것은 민주노조 운동이 노사정위원회를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의 기관으로 사용하려는 한국의 새로운 계급상황에서 현재적 의미를 획득한다.

7. 1996년 6월의 『지배와 사보타지』는, 네그리가 1970년대 후반에 노동자주의 시대의 동지들이 이탈리아공산당에 입당한 것을 비판하는 가운데 역사적 타협과 구조개혁론에 대항하는 자율주의적 입장의 고유성을 천명한 것이다.

8. 그러나 한국에서 자율주의는 탈혁명적 조류로부터는 레닌주의의 한 갈래로 인식되고 전통적 좌파로부터는 아나키즘과 동일시되면서 손쉽게 무시되거나 정당한 검토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9. 그러나 1996~7년 약 3개월여에 걸쳐 노동법의 신자유주의적 개악에 반대하는 전후 최초의 총파업이 전개되고, 이 새로운 투쟁과 위기의 상황에서 ‘혁명의 불가능성’을 설파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은 급속히 상실되었다. 이 상황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제도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더욱더 기울었고 이에 비판적인 노동운동 세력은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낡은 사회주의 정치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10. 이러한 과정에서 199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과 혼동되었던 푸코, 들뢰즈, 가따리가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전통적 좌파 정치학과는 다른 정치학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대상으로 떠올랐다.

11. 탈구조주의를 새로운 코뮤니즘의 정치학의 원천으로 만들려는 일종의 좌익화가 나타나 학생운동과 문화운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고, 안또니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12. 포스트모더니즘의 쇠퇴는 다시 ‘주체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그것은 근대성 비판을 탈주체성의 문맥 위에 정초한 알뛰세주의의 쇠퇴를 가져왔다.

13. 네그리는 ‘개체성, 국가의 권리보장, 인권, 전통적 민주주의 일부 계몽적 전통’ 등에 대한 강조로 기운 발리바르와 마슈레이의 구조주의적이고 정적인 스피노자 해석을 비판하면서 ‘다중의 구성적 활력에 근거한 공통체의 역동적 재구성’이라는 동태적 주체성을 탈근대적 문맥 속에서 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많은 점에서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과 공명하는 것이었으나 네그리는 ‘속성들의 문제를 조직화의 문제로 강력하게 제기함’으로써 들뢰즈와 차이를 드러낸다. ‘탈주의 스피노자’를 ‘구성의 스피노자’로 전환시킨다.

14. 1997년에 출간 된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 1』은 이탈리아 자율운동과 네그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사유들에 ‘자율주의’라는 명명을 부여함으로써 이것들이 아나키즘과 오인되지 않도록 하면서 그것을 네그리를 넘어 좀 더 포괄적인 자율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소개로 확대시키려는 기획의 일부였다.

15. 1997년의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는 지구적 경제위기를 가져오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1968년에 대두한 노동계급 불복종성에 대한 자본의 화폐적 대응’으로 보는 존 홀러웨이와 워너 본펠드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었고, 『사빠띠스따』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자율성의 살아 있는 모습을 포착하려는 시도였다.

16. 그리고 2001년 11월 한국어로 출간된 제국은 정치학은 물론 철학, 신학, 문학, 예술, 사회학 등 다양한 입장들에 새로운 사유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7. 하지만 이 책의 출간에 때맞춰 터진 2001년 9월 11일의 테러와 그에 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 3월의 이라크 전쟁, 그리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미국의 대이란 및 대북한 긴장으로 인해 이 책의 혁신적 주장들은 첨예한 현실정치의 시험을 치르고 있다.

18. 『제국』의 출간 이후 계간 『문화과학』이 네그리의 생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한국 사회의 수많은 부분에서 자율주의를 검토하는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2002년 7월의 자율평론~!

19. 우리는 사상 · 이론을 중심으로 자율주의의 역사와 그 수용 맥락을 검토했지만 자율주의는 결코 특정한 사상 조류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의 핵심은 주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삶을 운영하려는 다중의 자치적 노력 자체이다.